묘코우지(妙興寺)는 현재, 노치세산(後瀬山)의 서북쪽 산록, 무로마치(室町:1336-1573)시대에 와카사(若狭)를 수호한 武田씨의 저택 유적에 인접한 위치에 있다. 절 전언에 의하면 가마쿠라(鎌倉:1192-1333) 시대 중기, 日蓮 고승의 수제자 日像고승(1269-1342)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京都 妙顕寺派의 本山이다. 그 후, 당 절에 남아 있는 오바마(小浜) 시내에 서 최고(最古)의 禁制状으로 보여지는 봐와 같이, 武田씨가 지켜 주었고, 京極씨도 지극히 보호했다는 유서 있는 절이다.
본 화상(画像)의 오하시카몬(小足掃部)은 京極高次씨의 가신이고,「京極家臣分限帳写」에 의하면 小浜시대에는 곡물400섬, 松江 시대에는 곡물1,030섬을 가진 상급 무사이며, 당 절을 부흥시킨 창시자이다. 그런데 카몬(掃部)의 조상으로 보여지는 인물이, 『若狭国守護代記』의 1309년의 조항에 「北条代官帆足入道成願」으로서 인정되었다. 또, 이 시기가 당 절의 창건 (1293년)보다 16년 후이기 때문에, 조상과 절과의 어떤 인연에 의해, 상주(像主)가 와카사(若狭) 지역에 입성하거나, 당 절에 주지 방을 두어 부흥시킨 걸로 생각된다.
小足掃部의 화상(사진 위, 세로 69.1cm, 가로 31.7cm)은, 화폭 속의 제문(題文)에 의해 1622년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화상은 청초한 표현이고 온화한 용모의 상주(像主)의 성격까지 표현되어 있다. 부인 화상(사진 아래, 세로 73.2cm, 가로 42.5cm)은, 화폭 속의 제문(題文)에 사망년을 1618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아이의 발원(発願)에 의해 공양상(供養像)으로서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이 화상은, 모모야마풍(桃山風)의 여성 풍속을 잘 전할 뿐만 아니라, 제문(題文) 혹은 기법 등에서 양 화상(画像)이 거의 같은 시기인 1622년에 동일 화가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 수 적은 작품의 일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