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목 가게집은 근세 오하마(小浜) 상인중 제일가는 호상(豪商)이다. 도요토미(豊臣)씨 이후 아사노(浅野), 쿄오고쿠(京極),
사카이(酒井) 일가를 시중들고 영주와 함께 호상의 지위를 굳히고 운송선, 무역 업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대대로 이어온 집안이고,
끈목 가게 문서의 일부는 일찍부터 세상에 알려져서 저명하다.
끈목 가게집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가 와카사(若狭) 지역의 토지를 소유하고 지배하였던 시대에, 이미 문벌적 상인이 되어 있었다. 분록쿠(文禄) 원년(1592) 히데요시(秀吉)가 조선(朝鮮) 출격에 앞서, 나가마사(長政)의 목숨을 받고, 군량의 쌀이나 콩을 큐슈 나고야(九州名護屋)로 수송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사진에 게재된 문서는 秀吉의 서기(書記) 山中橘内(山城守長俊)가 秀吉의 아시아 지배 구상을 오오사카성(大阪城)에 기거하는 秀吉의 시녀 앞으로 보낸 유명한 서신이다. 또 豊臣의 은고(恩顧)인 여러 영주들에게 당시의 진귀품 도자기 항아리를 판매하거나, 츠가루(津軽) 지역에서 징수한 대량의 豊臣씨의 상납 미(米)를 남부나 오바마(小浜)로 옮긴 사실이 엿보인다.
게이쵸(慶長) 5년(1600) 京極高次무장이 와카사(若狭)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끈목 가게는 그 대관(代官)이 되어, 오뉴우군(遠敷郡)과 오오이군(大飯郡)내의 지배를 맡았다. 또 小浜마을 상인들로부터 공용미(혹은 엽전)를 징수하는 특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가 입성할 때도 京極씨와 같이, 군주의 숙소를 지켰으며, 공용전(公用銭)의 징수권도 대대로 인정받았으며, 여러 조세도 면제받았다. 호우레키(宝暦) 10년, 11년(1760, 61) 小浜의 가신(藩士:영주의 가신)들이 녹미미(俸禄米)를 저당하여 그 지역의 저장미를 차용했을 때의 증거 서류도 있다. 안세이(安政) 원년(1854) 4월에 어소(御所)내에서 과실로 일으킨 화재로 京都가 큰 화재를 당했고, 또 명치유신(明治維新) 정부의 화폐 정책에 관련된 것으로, 옛 기록의 발초(抜抄)는 에도막부(江戸幕府) 말기의 小浜에 있어서의 크고 작은 여러 사건이나 상거래에 관한 기록으로 흥미 깊다. 이러한 고문서에 의해 小浜의 행정, 상업, 항구 등의 모습이 알려질 뿐만 아니라 일본사로서도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