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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浜市


미늘로 구성된 몸통널(酒井忠利의 갑옷과 투구) - 한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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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소재지 관리자
1992.2.26 시 지정 小浜市大手町 小浜市


 사카이(酒井)씨는, 토쿠가와(徳川)장군 집안과 선조가 같으며, 대대로 이어온 계보(系譜)중에서 가장 역사 깊은 집안이며, 三河国 酒井 마을의 출신이다. 그 후, 酒井씨는 사에몬죠우(左衛門尉)와 우타노카미(雅楽頭)의 두 유파로 갈라져, 三河松平씨의 계보(系譜)가 되고, 이에야스(家康)의 직속이 되지만, 에도막부(江戸幕府)가 성립된 이후부터는, 우타노카미(雅楽頭)계의 酒井씨가 장군 일가에 복종해서 타이로우(大老:江戸시대, 장군을 보좌했던 최고직) 등의 요직을 맡았고, 酒井씨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바마(小浜)지방의 영주인 酒井 일가는, 이 雅楽頭계의 유파를 이어받는 마사치카(正親)의 3남 타다토시(忠利)가 家康 장군에 복종해서 전공(戦功)을 거듭해, 텐쇼(天正) 18년(1590)에 武蔵国 川越에 곡물 3천섬이 주어져고, 이어서 駿河国 田中에 곡물1 만섬, 다시 川越로 옮기고, 겐나(元和) 5년(1619)에는 곡물3만7천섬으로 증가, 에도성(江戸城)에 기거하는 중신(重臣)으로 취임한 것이 시작이다.
 忠利의 친자식인 忠勝은, 아버지와 함께 家康를 모시고, 처음 시모우사(下総)에서 곡물3천섬이 주어졌지만, 칸에이(寛永) 4년(1627) 忠利의 몰락과 함께 川越로 옮기고, 1634년에 小浜 지역의 초대 영주가 되었다.
 이 갑옷과 투구는, 忠利가 역전(歴戦)에 착용한 갑옷이고, 투구 함(函)에는 「龍」의 묵서(墨書)가 있다. 투구는, 히네노즈나리(日根野頭成) 투구에 흑색 가죽의 이치노타니(一ノ谷)의 쇠붙이가 붙어 있다. 몸통은, 철판으로 된 미늘(伊予札:투구와 갑옷의 미늘의 일종)을 바느질해서 가죽으로 씌우고, 몸통널에 붙여서 마름모꼴로 꿰매고 흑색 옻칠로 굳히는 튼튼한 구조이며, 위협을 보여주기 위해서 갈색 계통의 금색 실로 쿠사즈리(草摺:갑옷의 몸통 아래로 늘이어 허리를 가리는 것)를 붙인다. 여기에 쇠사슬로 만들어진 바가지 형태의 토시와 그밖에 패나 방패, 정강이의 싸개가 딸려 있다. 전국시대부터 모모야마(桃山)시대에 걸쳐 유행한 간소한 제작으로 되어 있다.
 이 갑옷과 투구는 실전용(実戦用)으로 만들어지면서, 투구의 화려한 쇠붙이의 의장(意匠)에는, 당시의 싸움터에서의 풍조를 살짝 엿 볼 수 있고, 장년(壮年) 무장이 착용한 전투 본의의 풍류를 나타낸 제작이다. 덧붙여 토시나 패・방패에는 酒井 일가의 가문이 새겨져 있어서, 각처에 남아 있는 손상에는, 忠利의 무수한 전공(戦功)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