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카츠(忠勝)는, 1587년 三河国 西尾에서 탄생하여, 아버지 備後守忠利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 복종하여, 세키가하라(関ケ原)전투에서 첫 출진(出陣)을 완수했다. 1620년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의 소임이 되고, 1622년에는 부슈우(武州)의 深谷에게 곡물1 만섬이 주어져서 영주의 대열에 끼였고, 1623년 家光가 장군이 되자, 다음 해 1624년에는 집정관(老中:江戸幕府의 직제로 최고의 지위를 가진 집정관)이 되었다. 1627년에는 아버지로부터 영지(遺領:사후에 남겨진 領地)를 물려받아 카와고에(川越) 지역으로 옮겼고, 1634년에는, 와카사(若狭) 3군(郡) 및 에치젠(越前)의 츠루가군(敦賀郡), 오미(近江)의 타카시마군(高島郡) 등 곡물 11만 3천 5백섬을 받고, 동년 8월에 처음으로 입성(入城)했다.
그 후, 쿄오고쿠(京極)씨가 오바마성(小浜城)을 완성시키는 등, 이후 14대, 235년간에 걸친 오바마 지역의 주춧돌을 쌓았지만, 와카사 재향은 지극히 적고, 칸에이(寛永) 15년(1638)에는 타이로우(大老:江戸시대, 장군을 보좌했던 최고직)직을 맡게 되는 등, 막부(幕政) 정치의 중추에 있었고, 얼마나 다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만년(晩年)은, 1656년에 상속자를 친자식 忠直에게 양보하고, 1660년 닛코(日光)에서 삭발하여, 空印이라고 칭했지만, 1662년 76세로 에도(江戸) 우시고메(牛込)의 저택에서 서거하여, 동 저택내의 長安寺에 매장되었다.
사누키(讃岐) 忠勝는, 「酒井忠勝書下」 등의 다수의 기록에 의하면, 무사로서 보다는 오히려 이에미쓰(家光)・家綱의 양 장군에 복종한 관료로서 탁월한 행정 수완을 발휘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또, 텐카이(天海)승려를 비롯해서 고승과의 교제도 활발하였고, 京都 万福寺의 殿堂을 건립하여 천량을 기부하는 등 신앙심도 깊었고, 본 초상화의 제문은, 黄檗宗의 개조인 잉겐(隠元)스님의 것이다.
본 그림은 세로 127.0cm, 가로 57.0cm 의 견본(絹本)에 그려져 있으며, 제작 년대는 확실치 않지만, 제문(題文)에서 경사스러운 어구를 볼 수 있거나, 1660년에 忠直가 카노우 에이신(狩野栄心)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도록 명령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忠勝의 삭발시의 초상으로 생각된다. 생애를 통해서 검소 견실을 관철한 忠勝스님의 만년의 풍모를 보기좋게 표현한 유일한 초상화로서 매우 귀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