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지(羽賀寺)는 오바마(小浜)시에서 유수한 고찰이며, 칙원(勅願)에 의해 창건되었고, 또 중세 이후 황실과의 관계가 깊으며, 소중히 간직된 80여통의 고문서에는 그다지 유례를 볼 수 없는 칙필(勅筆) 및 윤지(綸旨)가 포함되어 있다.
이 羽賀寺의 유래야말로, 陽光院 誠仁親王의 문서이고, 발문은 고요우제이(後陽成)천황의 칙필과 관련되고 있다.
지본・묵서로 되어 있고, 세로 50cm, 전체 길이 430cm의 두루마리로서 훌륭한 표구(表具)가 입혀져 있다. 아주 평이한 한문체로, 필적은 선명하게 쓰여져 있어 훌륭하다. 지금 羽賀寺의 유서와 역사를 더듬어 보자.
본 浄山에 자리잡은 羽賀寺는, 겐쇼우(元正)천황 교우레이키(御宇霊亀) 2년(716), 교우키(行基) 보살이 창건했다. 이 때 교우키(行基)보살의 연령은 48세였다. 그가 입멸하기까지 가람을 건립한 것은 실로 2백여채라고 한다. 당 절의 본존은 십일면관세음이고, 교우키(行基)보살의 작품으로서, 이 이상으로 훌륭한 색채를 가진 상은 없을 것이다. 그 후 헤이안(平安:794-1192) 중기에 본존과 함께 진흙에 잠기는 풍수해를 입었지만 그 후에 부흥되었고, 가마쿠라(鎌倉:1192-1333) 초기 源頼朝장군이 삼층탑(사리를 안치)을 건립해서 기부했다. 그러나 무로마치(室町:1336-1573)시대 초기에는 가끔 화재를 입었고, 지금의 탑은 분난(文安) 4년(1447)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천하태평 세계태평을 빌어 왔다. 이상이 천황의 필적에서 나타난 유서의 개요이다.
권미의 발문 12행 175 글자는 천황이 스스로 쓴 문서이다. 창건 이래 관세음보살의 위력을 모시고, 중생・시주・서민 모든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 사운(寺運)을 유지 발전했 왔지만, 지금 아키타 사네스에(秋田実季)의 동정심으로 수복(修復)을 달성한 것을 말하며 매듭짓고 있다.